태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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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고려)는 877년에 태어나 943년에 사망한 고려의 초대 국왕이다. 그는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으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호족과의 융합을 위해 혼인 정책을 펼쳤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민심을 통합하려 했다. 거란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훈요 10조를 통해 후대 왕들에게 통치 지침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한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한반도 통일의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며, 현대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만, 후계 구도 미비로 인한 초기 정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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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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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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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태조 |
한자 | 太祖 |
한국어 이름 | 왕건 |
한자 이름 | 王建 |
별호 | 약천 |
묘호 | 태조 |
시호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
재위 기간 | 918년 7월 30일 ~ 943년 7월 9일 |
출생일 | 877년 2월 4일 |
출생지 | 신라 한산주 송악 |
사망일 | 943년 7월 9일 |
사망지 | 고려 개경 신덕전 |
매장지 | 현릉 |
아버지 | 세조 왕륭 |
어머니 | 위숙왕후 한씨 |
가문 | 개성 왕씨 |
종교 | 불교 |
연호 | 천수 (918년 ~ 933년) |
왕위 | |
왕조 | 고려 |
즉위 | 918년 태봉 포정전, 철원 |
전임자 | '왕조 건립' 경순왕 (신라 마지막 왕) 견신검 (후백제 마지막 왕) |
후임자 | 혜종 |
왕비 | 신혜왕후 유씨 장화왕후 오씨 신명순성왕후 유씨 신정왕후 황보씨 신성왕후 김씨 정덕왕후 유씨 |
후궁 | 대부인 헌목 부인 정목 부인 동양원 부인 숙목 부인 천안부원 부인 흥복원 부인 대량원 부인 후대량원 부인 대명주원 부인 광주원 부인 소광주원 부인 동산원 부인 예화 부인 대서원 부인 소서원 부인 서전원 부인 신주원 부인 월화원 부인 소황주원 부인 성무 부인 의성부원 부인 월경원 부인 몽량원 부인 해량원 |
자녀 | 아들: 혜종 (왕무) 왕태 정종 (왕요) 광종 (왕소) 문원대왕 (왕정) 증통국사 대종 (왕욱) 안종 (왕욱) 왕위 왕인애 원장태자 왕조이 수명태자 효목태자 (왕의) 효은태자 (왕원) 원녕태자 효성태자 (왕임주) 효지태자 왕직 광주원군 효제태자 효명태자 법등군 자리군 의성부원대군 딸: 낙랑공주 흥방공주 대목왕후 문혜왕후 선의왕후 왕씨 공주 순안왕대비 왕씨 공주 왕씨 공주 |
군사 | |
소속 | 태봉 |
참전 | 후삼국 시대 나주 전투 공산 동수 전투 고창 전투 |
2. 생애
877년 송악(현재 개성)의 유력한 호족 가문에서 태어난 왕건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892년 아버지 왕륭과 함께 당시 세력을 키우던 궁예에게 귀부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왕건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태봉(후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기여하며 점차 명성을 쌓았다.
918년, 궁예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인 고려를 건국하였다. 국호를 고구려 계승의 의미를 담아 '고려'라 정하고, 개성을 수도로 삼아 후삼국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건국 초기에는 후백제의 견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918년 잠시 화의를 맺기도 했으나, 이후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특히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했지만, 930년 고창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왕건은 외교와 군사력을 병행하며 통일을 추진했다.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하여 항복해왔고, 같은 해 후백제 내부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936년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이후 왕건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을 목표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서경(평양)을 중시했으며, 926년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는 942년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에서 보이듯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지방 호족 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혼인 정책과 기인 제도를 활용했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가의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943년 병세가 깊어지자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열 가지 지침인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고, 박술희에게 태자 무의 보필을 부탁한 뒤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능은 개성의 현릉이다.
2. 1. 출생과 가계
877년 1월 31일, 왕건은 송악(松嶽, 현재의 개성) 남쪽의 자택에서[46] 당시 송악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王隆)과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왕륭은 훗날 궁예가 세력을 일으키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태봉의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지내기도 했다. 왕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뛰어나 장부다운 기상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왕건 가계의 증조부 이전 기록은 다소 불확실하며, 언제부터 왕씨(王氏) 성을 사용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증조모인 정화왕후 강씨(康氏, 진의)는 고구려 유민 출신인 강호경과 강충의 후손으로, 신천 지역 호족 가문이었다. 이는 왕건 가계가 고구려 계통과 연관됨을 시사한다.[51][52]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편찬한 편년통록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전설적인 요소가 강하여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2][3] 실제로 고려 왕실의 공식 족보인 『성원록』(聖源錄)이나 『왕대종족기』에는 작제건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제건과 관련된 설화(용녀와의 만남 등[4])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왕건 가문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나 설화로 여겨진다.[2][5]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왕건이 당나라 황제의 후손이라는 설을 부정하였다.[6]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왕건의 조상들이 송악(개성)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영향력 있는 고구려계 호족 세력이었을 것으로 본다.[7][9]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왕건의 조상이 고구려 귀족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 왕건의 고향인 개성을 포함한 북부 지역은 후삼국 시대에 고구려 유민들의 주요 거점이었으며,[10][11] 901년에는 태봉(후고구려)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12] 이는 왕건과 그의 가계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한편, 신라의 승려 도선이 왕륭을 만나 아들 왕건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13] 이 역시 왕건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후대의 설화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2. 2. 궁예의 휘하 부장
신라 말기 혼란한 후삼국 시대에 송악(松嶽)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왕륭과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 태어난 왕건은 896년 아버지 왕륭과 함께 당시 중부 지방의 강자였던 궁예에게 귀부하여 그의 휘하 장수가 되었다. 이는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신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태봉의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898년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에 임명되었고,[48]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당성(唐城), 청주, 괴양(槐壤) 등을 성공적으로 평정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 벼슬을 받았다. 또한 황해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주 및 인근 지역 점령은 왕건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903년에 처음 나주를 점령했다는 기록[48]과 909년에 점령했다는 주장[53]이 공존하는데, 이는 중간에 견훤이 나주를 일시적으로 탈환했다가 왕건이 재점령하는 등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나주 점령은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해상 교역로를 차단하여 태봉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주 점령의 공으로 왕건은 알찬(閼粲)으로 승진했으며, 이후에도 나주 지역을 둘러싼 전투는 계속되었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했고, 909년에는 진도 부근의 섬들을 공격하고 나주를 다시 공략했다. 나주 지역 확보 과정에서 왕건은 덕진포(德津浦)에서 적은 수의 전함으로 견훤의 대규모 함대를 화공으로 격파하여 서남해안 지역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다만, 나주 정벌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궁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54]
왕건은 군사적 성공뿐만 아니라, 정벌한 지역의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써 민심을 얻었다. 그의 덕망과 포용력은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고, 이는 훗날 그가 새로운 왕조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들을 바탕으로 왕건은 913년 마침내 문무백관의 최고 직위인 시중(侍中)에 올라, 궁예에 이은 태봉의 제2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중으로서 왕건은 공정한 정사를 펼치고 억울하게 모함받은 이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궁예는 말년에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 칭하며 폭정을 일삼았고, 이는 많은 신하와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의 군사적 성공과 덕망은 더욱 부각되었고, 훗날 918년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 여러 장수와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 배경이 되었다.
2. 2. 1. 장화왕후 오씨와의 만남

북원의 성주 양길이 후백제와 동맹을 맺고, 후백제의 견훤은 양길을 대장군으로 삼아 태봉을 공격했다. 이에 왕건은 군사 일부를 북원성으로 보내 양길군과 맞서게 하고, 자신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배후인 목포, 신안, 나주 일대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의 유력 호족 오다련군 세력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후백제에 등을 돌린 서남해안 지역 호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했다.
나주 공략 중 왕건과 오씨의 만남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한 이야기는 왕건이 배 위에서 나주 시내를 바라보다 오색 구름을 보고 달려가 빨래하던 오씨를 만났다는 것이고, 다른 이야기는 왕건이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금성산 남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그곳으로 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오씨를 만났다는 것이다. 왕건이 물을 청하자, 오씨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넸다. 왕건이 이유를 묻자, 오씨는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했다"고 답하며 얼굴을 붉혔다고 전해진다.
이에 감명받은 왕건은 오씨의 아버지인 호족 오다련군을 찾아가 청혼했고, 오다련군은 왕건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혼인을 승낙했다. 오씨는 왕건을 만나기 며칠 전 금룡이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은 오씨와 혼인하여 아들 무(훗날 혜종)를 낳았으나,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오씨는 본래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왕건의 부인이 되어 혜종을 낳았다. 훗날 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장화왕후로 추존되었다. 태조 왕건은 혜종에게 왕위 계승 자격이 있음을 알았지만, 어머니 오씨의 가문 배경이 상대적으로 약해 후계 구도에서 불리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징표로 자황포(황제의 옷)를 옷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전해주었다. 훗날 태조가 태자를 정할 때, 오씨가 대광(大匡) 박술희에게 이 자황포를 보여주자,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으로 삼도록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장화왕후 오씨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나주 지역에는 여전히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2. 3.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난 왕건은 896년 아버지와 함께 궁예 휘하에 들어가 장수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충주, 청주 등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태봉의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고, 특히 후백제와의 해전에서 승리하여 나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견훤 세력을 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8] 이러한 공로로 마흔이 되기 전에 최고 관직인 시중(侍中)에 올랐다.그러나 궁예가 점차 폭정을 일삼고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 칭하며 많은 신하와 심지어 부인과 아들까지 살해하자 민심과 신망을 잃어갔다. 궁예의 독단과 공포 정치에 위협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 주요 장군들과 호족들은 918년 음력 6월, 왕건을 추대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왕건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이들의 뜻을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켰고,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14] 그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선포하며 고려 왕조를 열었다. 이듬해인 919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려 건국 후, 왕건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주요 경쟁 상대는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신라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며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했다. 전쟁 초기인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배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이후 고려는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935년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자진하여 고려에 항복했고,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신라 세력을 평화적으로 통합했다. 같은 해, 후백제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로 귀순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후백제 정벌의 명분을 강화했다.
936년, 왕건은 귀순한 견훤과 함께 후백제 정벌에 나서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격파했다.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하였고,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통일 왕조인 고려 시대를 열었다.
2. 3. 1. 호족 유화 정책
고려는 건국 초기 각지의 호족들이 연합한 형태를 띠고 있어,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요소로 작용했다. 이에 태조는 호족 세력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유화 정책을 펼쳤다.가장 대표적인 것은 혼인 정책이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각지의 유력 호족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그들의 딸이나 누이와 혼인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정주의 류씨, 충주의 유씨, 황주의 황보씨, 경주의 김씨, 평산의 유씨, 광주의 왕씨, 신천의 강씨, 평산의 박씨, 의성의 홍씨 등 유력 호족 가문의 여성들을 왕후나 후궁으로 맞이했다. 이를 통해 총 29명의 왕후와 부인을 두었는데[48],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다양한 호족 세력을 포용하고 왕실과 연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또한 후백제계 세력인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들을 후비로 삼고[49], 935년 신라가 항복하기 전에는 신라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김억렴의 딸 신성왕후와 혼인하는 한편[50], 자신의 딸 낙랑공주와 다른 딸을 신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 이중의 혼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부가적으로, 그때까지 성씨가 없던 부하 장수나 병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는 사성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인 정책만으로는 모든 호족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딸이나 누이가 없는 호족도 존재했다. 이에 왕건은 기인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호족들의 아들, 동생, 조카 등 자제들을 학문 수양이나 관직 수행을 명분으로 수도인 송도로 오게 하여 머무르게 한 제도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인재 양성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호족 자제들을 정치적 인질, 즉 볼모로 삼아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왕건은 자신과 혼인 관계를 맺은 호족들에게도 자제를 송도로 보내게 함으로써 다른 호족들의 반발을 줄이고 제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유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려 건국에 참여했던 개국공신들이나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어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들의 사병은 일부 압류하였으나, 호족들의 사병까지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고 소수의 관군만으로는 호족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는 이후 왕권 안정에 지속적인 과제로 남게 되었다.
2. 3. 2. 북진 정책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옛 고구려 영토 회복을 목표로 하는 '''북진 정책'''(北進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15] 이는 구 고구려 세력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북진 정책의 핵심 거점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서경(西京, 현 평양)이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918년 즉위 당시 평양은 오랫동안 폐허 상태였고 주변 지역은 외적의 활동 무대가 되어 고려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16] 이에 왕건은 즉위 첫해부터 서경 재건을 명령하고,[16] 사촌인 왕식렴을 파견하여 방어하게 하는 등[17] 서경 개척에 수도인 개경보다 더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경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아 거의 매년 순행하였으며, 장차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밝혔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또한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우고 삼국통일을 이룬 것을 염두에 두고 개경과 서경에 탑을 세울 때, 서경의 탑을 개경보다 훨씬 높게 짓기도 했다.
왕건은 926년 이전부터 요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북진 정책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서북면을 개척하고 여진족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 군사적인 노력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북진 정책의 결과, 왕건이 사망할 무렵 고려의 국경선은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장되어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왕건은 거란(요)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훈요십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분노하여 942년 거란 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낸 만부교 사건이 있다.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과 발해 유민 포용 정책에 기반한 강경한 외교적 대응이었다.
2. 3. 3. 거란과의 관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며 사신과 함께 낙타를 선물로 보냈지만, 왕건은 이를 거부하였다.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 없는 나라라고 비판하며,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 굶겨 죽였다. 이를 만부교 사건이라고 한다. 이후 거란이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왕건은 또다시 거절하며 거란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또한 왕건은 죽기 전 남긴 훈요십조를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항상 경계할 것을 후대 왕들에게 명하였다.이러한 강경책과 더불어 왕건은 오대 십국 여러 나라에 꾸준히 사절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으며 거란과 여진족을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특히 후진(後晉)에서 온 승려 말라(末邏)를 통해 후진의 고조(高祖)에게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는 내용을 담은 외교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2. 3. 4. 후삼국 통일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후삼국 시대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919년에는 자신의 세력 기반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초기에는 후백제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927년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왕위에 앉힌 뒤 고려로 군대를 돌렸다. 왕건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공산(현재 대구 팔공산 부근)에서 후백제군과 맞섰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18]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 김낙 등 핵심 장수들을 잃었으며,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19][20][21]
공산 전투의 패배로 잠시 수세에 몰렸던 고려는 빠르게 전열을 정비했다. 930년 고창 전투(현재 경상북도 안동)에서 후백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고려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자진 항복했다. 왕건은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왕족으로 예우하며, 자신의 딸 낙랑공주와 다른 딸[50]을 혼인시키는 등[49]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고려의 정통성을 높이고 통일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 신검이 동생 양검, 용검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했고, 왕건은 그를 받아들여 상보(尙父)로 높이며 극진히 대우했다.
936년 왕건은 귀순한 견훤과 함께 후백제 정벌을 위한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내부 분열과 고려군의 압도적인 공세 앞에 신검은 결국 항복하였고,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을 통해 왕건은 마침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는 통일 신라 이후 분열되었던 한반도를 다시 하나로 통합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2. 4. 생애 후반
태조는 고려 건국 이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통일 왕조로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데 힘썼다. 생애 후반기에도 그는 불교를 장려하여 민심을 통합하고 국가의 사상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943년 병세가 깊어지자, 왕건은 후계자인 태자 무의 지지 기반이 약한 것을 염려하여 고명대신(顧命大臣) 박술희에게 태자의 보필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또한 같은 해, 후대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지어 박술희에게 전달하였다. 이 훈요십조는 이후 고려 왕조의 중요한 통치 지침이 되었다.
같은 해 음력 5월 29일, 왕건은 67세를 일기로 신덕전(神德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능은 개성에 위치한 현릉(顯陵)이다.
2. 4. 1. 불교 장려 정책
태조는 고구려-발해 계승 의식과 더불어 불교 장려를 통해 사상적 통일과 단결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는 민족 화합 정책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고려를 안정된 통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공식적인 국교로 삼고 숭불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태조 스스로 매일 불당을 찾아 부처에게 불공을 드리며 모범을 보였다.숭불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王師)로 삼았으며, 940년 충담이 세상을 떠나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직접 비문을 지어주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충청도 지역에 개태사를 완공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세워 공신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벽에 걸었다. 이와 함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누구나 불법(佛法)을 들을 수 있도록 무차대회(無遮大會)[62]를 개최하고, 해마다 열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불교 신앙이 민간에 널리 퍼지고 백성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2. 4. 2. 사망
943년(태조 26년), 왕건은 병세가 깊어져 임종을 앞두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태자 무(훗날 혜종)를 정윤(正胤, 왕위 계승자)으로 삼았으나, 태자 무의 외가 세력이 약한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중대광 박술희를 불러 태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같은 해 4월, 왕건은 후대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본보기로 삼도록 교훈을 담은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만들어 박술희에게 전했다. 훈요십조는 이후 고려 왕들에게 계승되어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요약 |
---|---|
제1조 | 불교를 숭상하고 보호하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 금지 |
제2조 | 사원은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서만 신중히 건립하고 함부로 짓지 말 것 |
제3조 | 왕위 계승은 적장자를 원칙으로 하되, 현명하면 차자도 가능 |
제4조 | 중국의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특히 거란의 풍속과 언어는 본받지 말 것 |
제5조 | 서경(평양)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왕은 매년 100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
제6조 | 연등회와 팔관회를 원래 취지대로 성실히 거행할 것 |
제7조 | 상벌을 공정히 하고 간언을 잘 들으며,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
제8조 |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옛 백제 지역) 출신 인물은 반역의 우려가 있으니 등용에 신중할 것 |
제9조 | 관리와 군인의 녹봉을 함부로 바꾸지 말고, 평화 시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무예가 뛰어난 자를 포상할 것 |
제10조 |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를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
936년 후삼국 통일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668년 신라의 통일은 한민족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북부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존속했던 반면, 왕건의 통일은 신라와 발해로 나뉘었던 민족을 하나의 국가 아래 통합한 보다 완전한 통일이었다.[15] 이 통일로 한반도는 1948년 남북 분단 이전까지 약 1,000년 동안 단일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고려 왕조가 4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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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王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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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특히 제8조는 후백제 지역 출신 인물의 등용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이는 후백제 말기 견훤과 아들 신검 사이의 왕위 다툼과 같은 사건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고려 사회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전라도 지역에 대한 차별 의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943년 음력 5월 29일, 왕건은 신덕전(神德殿)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유언을 남기려 할 때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웃었다고 전해진다.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능은 개성에 있는 현릉(顯陵)이다.
3. 가족 관계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장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기록상 확인되는 왕후와 부인은 29명이며, 슬하에 25남 9녀를 두었다.
'''부모'''
'''왕후 및 부인'''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주요 자녀) 제1비 신혜왕후 유씨
神惠王后 柳氏정주 미상 유천궁
柳天弓
미상자녀 없음 제2비 장화왕후 오씨
莊和王后 吳氏나주 미상 오다련
吳多憐
연덕교
連德交혜종, 공주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
神明順成王后 劉氏
신명순성왕태후
神明順成王太后충주 미상 유긍달
劉兢達
미상태자 태,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안정숙의공주, 흥방공주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神靜王后 皇甫氏
신정왕태후
神靜王太后황주 미상 - 983년 황보제공
皇甫悌恭
미상대종, 대목왕후 제5비 신성왕후 김씨
神成王后 金氏
신성왕태후
神成王太后경주 미상 김억렴
金億廉
미상안종 제6비 정덕왕후 유씨
貞德王后 柳氏정주 미상 유덕영
柳德英
미상왕위군, 인애군, 원장태자, 조이군, 문혜왕후, 선의왕후, 공주 제7비 헌목대부인 평씨
獻穆大夫人 平氏경주 미상 평준
平俊
미상수명태자 제8비 정목부인 왕씨
貞穆夫人 王氏강릉 미상 왕경
王景
미상순안왕대비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
東陽院夫人 庾氏평산 미상 유금필
庾黔弼
미상효목태자 의, 효은태자 원 제10비 숙목부인 임씨
肅穆夫人 林氏진주 미상 임명필
林名必
미상원녕태자 제11비 천안부원부인 임씨
天安府院夫人 林氏경주 미상 임언
林彦
미상효성태자 임주, 효지태자, 공주 제12비 흥복원부인 홍씨
興福院夫人 洪氏홍주 미상 홍규
洪規
미상태자 직(왕직), 공주(왕일후 공주) 제13비 후대량원부인 이씨
後大良院夫人 李氏미상 미상 이원
李元
미상공주 제14비 대명주원부인 왕씨
大溟州院夫人 王氏강릉 미상 왕예
王乂
미상자녀 없음 제15비 광주원부인 왕씨
廣州院夫人 王氏양근 미상 왕규
王規
미상[64]왕광주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왕씨
小廣州院夫人 王氏양근 미상 왕규
王規
미상[65]광주원군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
東山院夫人 朴氏승주 미상 박영규
朴英規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甄氏견훤의 외손녀, 자녀 없음 제18비 예화부인 왕씨
禮和夫人 王氏해주 미상 왕유
王柔
미상자녀 없음 제19비 대서원부인 김씨
大西院夫人 金氏서흥 미상 김행파
金行波
미상자녀 없음 제20비 소서원부인 김씨
小西院夫人 金氏서흥 미상 김행파
金行波
미상자녀 없음 제21비 서전원부인 ▨씨
西殿院夫人 ▨氏미상 미상 미상 자녀 없음 제22비 신주원부인 강씨
信州院夫人 康氏신천 미상 강기주
康起珠
미상광종의 양모, 자녀 없음 제23비 월화원부인 ▨씨
月華院夫人 ▨氏미상 미상 ▨영장
▨英章
미상자녀 없음 제24비 소황주원부인 ▨씨
小黃州院夫人 ▨氏미상 미상 ▨순행
▨順行
미상자녀 없음 제25비 성무부인 박씨
聖茂夫人 朴氏평주 미상 박지윤
朴智胤
미상효제태자, 효명태자, 법등군, 자리군, 공주 제26비 의성부원부인 홍씨
義城府院夫人 洪氏의성 미상 홍유
洪儒
미상의성부원대군 제27비 월경원부인 박씨
月鏡院夫人 朴氏평주 미상 박수문
朴守文
미상성무부인의 조카, 자녀 없음 제28비 몽량원부인 박씨
夢良院夫人 朴氏평주 미상 박수경
朴守卿성무부인의 조카, 자녀 없음 제29비 해량원부인 ▨씨
海良院夫人 ▨氏미상 미상 ▨선필
▨宣必
미상자녀 없음
4. 유산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워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서경(현재의 평양)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16][17] 그는 서경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주 순행하는 등 북진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왕건 재위 말기에는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왕건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태자였던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발해 지배층 인사들을 고려로 맞아들여 왕족으로 편입시키는 등[22] 따뜻하게 대우했다. 왕건은 발해를 '친척의 나라' 또는 '혼인으로 맺어진 나라'라고 부르며 강한 유대감을 표현했고,[23][24] 이는 고구려의 두 후계 국가가 실질적으로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5][23] 이는 발해와 적대적이었던 신라의 정책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25]
반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적대 정책을 펼쳤다. 942년 거란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보냈으나, 왕건은 발해 멸망에 대한 분노를 표하며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들을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26] 이는 만부교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의 강력한 대거란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후진의 고조에게 거란을 함께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23][27]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도 거란을 '짐승과 같은 나라'로 규정하며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26]
왕건의 통일과 정책들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장기적인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오늘날 사용되는 '코리아(Korea)'라는 명칭도 '고려'에서 유래했으며,[15] 한민족 최초의 완전한 통일을 이룬 그의 업적은 현대 한국인들이 현재 한반도 분단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참고되기도 한다.
5. 대중문화 속의 태조
작품명 방송사 방영 연도 배우 비고 용의 눈물 KBS 1996년 ~ 1998년 김경응 태조 왕건 KBS 2000년 ~ 2002년 최수종, 오현철 (아역) [30] 제국의 아침 KBS 2002년 ~ 2003년 최수종, 이문수 회상 장면 등 천추태후 KBS 2009년 조명남 정도전 KBS 2014년 미상 빛나거나 미치거나 MBC 2015년 남경읍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SBS 2016년 조민기 왕영 tvN 2024년 이성민
=== 영화 ===
=== 기타 ===구분 매체 연도 내용 비고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III 고려 문명 지도자로 등장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IV 고려 문명 지도자로 등장 TV 프로그램 천일야사 (채널A) 2018년 73회에서 태조 왕건 관련 내용 방영 [31] 뮤지컬 태조 왕건 2022년 태조 왕건 역할 등장 [32]
6. 비판
재위 기간 중의 정치적 역량은 매우 뛰어났지만, 집권 기간 동안 호족 세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후계 구도를 제대로 잡지 못해 그의 사후 고려 초기의 정치 혼란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대 혜종의 권력 기반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해 그의 사후 정종의 쿠데타와 광종의 대량 숙청이 일어나 고려 초기 사회가 혼란해진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그도 생전에 여러 호족 통제 정책들을 시행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또한 주요 왕자들을 전쟁터로 늘 데려가 왕자들의 군사적 세력을 키워줘 결국 신검을 비롯한 왕자들의 난으로 권력을 잃은 견훤과 달리, 왕건은 장남인 왕무(혜종)만을 전쟁터에 늘 데리고 가 공을 세우게 해 주고, 이에 반해 다른 왕자들은 외면해서 다른 왕자들이 군사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았다. 또 자신의 사후 후계 문제를 우려해 박술희, 왕규, 염상, 박수문 등을 혜종의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후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혜종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믿고 그에게 보위를 넘겨 주었다. 또한 혜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혜종과 정종의 아내들을 서로 자매들로 혼인시켜 둘의 싸움을 만류하는 정치적 배려까지 썼지만 더 치밀하지 못해[63] 그의 사후 고려는 한동안 반란과 숙청으로 혼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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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호족, 관료, 중인, 평민, 승려, 속인, 남녀노소, 귀천 등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고 널리 일반 대중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불교의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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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예를 들어 혜종을 권력 있는 호족들과 결혼을 시키는 것, 또 이와 반대로 정종이 강력한 호족들과의 혼인을 해 세력을 확장시켰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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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년(혜종 2년) 왕규의 난으로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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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흥복원부인 홍씨의 딸로, 작호가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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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원부인의 동생이며 견훤의 외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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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과 문성왕후 박씨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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